칼 로저스는 1902년에 시카고 교외 오크 공원에서 태어났는데, 5남 1녀 중 넷째였다. 로저스는 부모님이 다정하고 애정 어린 분들이었고 자녀의 행동을 통제했다고 기술했다. 부모님 두 분 다 종교적으로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에 자녀들은 춤과 알코올, 카드놀이, 극장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라고 배웠다. 로저스가 12세 되던 해에 잘 나가던 토목기사이자 도급업자였던 아버지는 시카고 남부에 있는 농장으로 가족의 거처를 옮겼다.
로저스는 청소년기 삶의 대부분을 혼자 하는 활동을 하면서 보냈다. 중고등학교를 세 번이나 옮겨 다녔고, 다니는 하교마다 장거리 통학을 했기 때문에, 방과 후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모험 이야기와 농업 관련 저술을 읽는 데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여름이면 들판에서 농기구를 작동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농사에 대한 흥미는 그가 농장에서 가축을 치고 특정한 유형의 나방을 모으고 길러낸 데서도 나타났는데, 이러한 관심 때문에 이후 위스콘신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농업을 전공했다.
하지만 종교 대회, 특히 중국에서 개최된 대회에 참가한 경험으로 인해 진로 목표를 목회로 바꾸었다. 로저스는 중국에 있는 동안 어린 시절에 배웠던 종교관에 의문을 품고 종교에 대한 관념의 폭을 넓혔다.
로저스는 위스콘신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Helen Elliott과 결혼했고,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하려고 뉴욕으로 갔다. 그곳에서 2년 과정을 마친 후 임상 및 교육 심리학을 공부하려고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편입했다. 1931년에 그는 임상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목회 대신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어쩌면 로저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기 때문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반드시 특정한 믿음을 공언해야 하는 어떤 분야에 있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인간중심 치료의 발달 과정은 네 단계 혹은 국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발달 단계는 로저스가 전문가로 일했던 초창기 시절을 포함한다.
두 번째, 비지시적 단계는 이론의 발달이 시작되고 내담자에 대한 이해와 이해의 전달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 번째 내담자 중심 단계는 성격 및 치료적 변화에 대한 이론을 좀 더 발전시키고 기법보다는 사람에 대한 초점을 유지하는 특성을 담고 있다. 네 번째, 인간중심 단계는 개인 치료를 넘어서 부부 상담과 집단 치료, 정치적 활동 및 변화로 그 적용 범위를 넓힌다. 이 단계들의 점진적인 발달과 로저스가 심리치료에 이바지한 부분을 다음에 논의하고자 한다.
그가 처음 일했던 곳은 뉴욕의 로체스터에 있는 아동 학대 예방 협회의 아동 연구 부서였다. 로체스터에서 보낸 12년 중 처음 8년간은 법정과 사회 기관에서 의뢰한 사회, 경제적으로 혜택받지 못한 비행 아동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을 했다. 그의 초창기 심리치료는 정신분석 개념에 영향을 받았지만, "상처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 묻혀 있는 경험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내담자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의 관점은 점차 달라졌다.
로체스터에 있는 동안 그는 [문제 아동의 치료]를 집필했고 사회복지사와 심리학자를 훈련하고 수련 감독을 했다.
1940년에 로저스는 오하이오주 콜롬비아로 직장을 옮겨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임상심리학 분야의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정교수 직위를 제안받았는데, 주된 이유는 그의 저서가 거둔 성공 때문이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있는 동안 그의 이론적 접근은 두 번째(비지시적) 단계로 진입했다. 로저스는 1940년에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때 심리치료에 대한 그의 관점이 임상 분야에 새로운 이바지를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접근은 내담자가 스스로 책임진다는 데 초점을 두었다.
중요한 것은 내담자와 상담자의 관계인데,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과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그 결과 자기 삶에 대해 좀 더 책임을 지도록 신뢰와 허용이 주어지는 관계이다. 내담자 감정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는 감정의 반영과 명료화가 이 시기 로저스 치료의 핵심이었다.
질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질문이 내담자의 자기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네소타에서의 강연과 그의 저서인 [상담과 심리치료]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는데, 일부는 로저스의 견해를 열렬히 받아들였고 일부는 극렬하게 비판했다.
로저스는 어떻게 이런 새로운 비지시적 접근을 개발하게 되었는가? 로체스터에서 아동을 치료하는 동안 그는 Otto Rank가 이끄는 세미나에 영향을 받았다. 이 밖에도 로체스터 클리닉에서 일했던 사회복지사 Elizabeth Davis와 Rank의 학생이었던 Jessie Taft는 Rank의 견해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공유했고, 이것이 로저스의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Rank는 이미 Freud의 정신 분석적 접근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자아와 원초아에 초점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개인의 창의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Rank에게 치료 목표는 개인이 자신의 고유성과 자기 사람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자기 스스로 힘 북돋우기와 자기 표현하기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담자는 전문가나 권위자의 역할보다는 비판단적인 조력자의 임무를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정신분석가와 달리 Rank는 기법이나 과거사보다 개인의 고유성과 개인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성을 강조했다. Rank에 비해 Adler의 이론적 관점은 Rogers의 심리치료에 직접적인 영향을 덜 미쳤다. 하지만 로저스와 Adler는 공통으로 개인의 가치 및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자 하는 욕구를 강조했다. 두 사람 모두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Watts는 사회적 관심에 대한 Adler의 관점이 로저스가 치료적 변화에 필요한 핵심 조건을 발전시키는 데 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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