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독특하면서도, 이상한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이 많던 시절,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때가 고등학생 때였다. 아들러의 이론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준 책이었지만, 지금 보면 정말로 잘 쓴 책이었다고 생각하며, 나에게 많은 힘을 준 책이었다. 심리학의 거장 중의 한 명인 아들러에 대해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아들러 학파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1870년 2월 7일 알프레드 아들러는 중산층의 헝가리계의 부모님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처의 작은 마을인 루돌프샤인에서 태어났다. 프로이트가 유대인이 대부분인 지역에서 성장했지만, 아들러의 주위에는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었다. 그는 유대 문화보단 비엔나 스타일의 문화에 익숙했고, 그의 저술방식엔 반유대주의가 섞여 있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아들러의 초기 생애는 몇 가지의 심각한 질병과 충격적인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비타민D 결핍으로 인한 구루병은 그의 자아상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후두 발작으로 인해 호흡곤란을 겪기도 하여 울기라도 하면 질식의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중에 5세 때 심각한 폐렴 발병은 치명적이었다.
3세 땐 한 침대에서 자던 형제의 죽음을 경험하였고 집 밖에서 발생한 두 번의 사고를 겪으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 정보가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열등감[대부분 신체적 열등감]과 사회적 관심이라는 아들러의 중요한 개념을 발달시키는 데 영향을 미친 인생관에 초기부터 노출되었음을 의미한다.
초기 학창 시절 평범한 학생이었던 아들러는 수학에서 낙제하게 되는데, 교사가 아들러의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기술을 배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였지만, 아버지는 아들러에게 계속 공부하도록 격려하였다.
이후, 아들러는 우수한 수학 성적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여러 면에서 뛰어난 학생이 되었다. 아들러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늘 음악을 사랑했고 그가 어렸을 때 외웠던 오페레타를 부르곤 했다.
중등학교 졸업 후 1888년에 비엔나에 있는 의대에 입학하였고, 일 년간 군 복무를 마친 후 1895년에 졸업하였다. 이 기간에도 음악에 관한 관심은 여전하였고 사회주의 발달에 관한 정치적 모임에도 관심을 가졌다. 아들러는 1897년에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한 러시아 출신의 여학생과 결혼하였다.
1898년에 아들러는 안과 의사로 개업했다가 이후에 일반의를 거쳐, 몇 년 후 환자의 신체적 상태는 물론,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상태에 대해서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신념으로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전인에 대한 이러한 관심을 말년에 그의 저술과 정신의학에 대한 태도에 반영되었다.
1902년에 프로이트는 아들러를 자신의 정신분석학 모임에 초대하였다. 아들러는 초기의 4명의 회원 중 한 명으로 1911년까지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에 남아 활동했다. 1905년 초, 그는 의학과 교육학 저널에 정신분석학에 근거한 논문을 작성하여 1907년에 처음으로 발표하였는데 [기관 열등감과 심리적 보상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당시 정신분석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런 아들러의 견해는 생물학적 욕구와 달리 주관적으로 지각하는 것과 사회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신분석학적 이론과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1911년 아들러는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의 회장이 되었지만 23명의 회원 중 9명과 함께 학회를 탈퇴하였다. 학회의 일부 회원들은 프로이트와의 화해를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아들러는 정신분석학적 연구나 조사와는 다른 방향의 학회를 창설하였고 1년 후 개인심리학회로 명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아들러는 활동이 부진해지자 그 기간 군의관으로 다시 복무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기근, 전염병을 비롯하여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이 비엔나를 덮쳤다. 이러한 사건들은 아들러의 사회주의적 입장을 확고하게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오히려 아들러는 학교와 교사 양성 기관을 개혁하면서 그의 교육적 견해를 이용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26년에 아들러는 유럽과 미국에서 매우 활발히 논문을 발표하고 강연을 다녔다. 1927년 10월, 그는 오하이오주 스프링피드의 위튼버그 대학에서 열린 위튼버그 심포지엄에 참석하였고 그때 이후로 그는 미국에서 많은 강연을 하였다. 1935년 유럽에서 나치 정권의 득세가 예견되자, 아들러 부부는 뉴욕으로 망명하였다. 1932년 롱아일랜드 의과대학에서 의료심리학과의 학과장으로 임명된 이래 아들러는 이 대학에 근무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개인적인 연구를 계속하면서 전 세계로 강연을 다니다가 유럽에서 순회 강연 중이던 1937년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자녀인 Kurt와 부인인 Alexandra는 심리치료학자로 활동하면서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아들러는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성격 및 심리치료이론을 남겼다.
내담자의 삶과 문제에 대해 아들러는 광범위하고 개방적이며 통합된 유기체인 전체로서의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나머지 부분과 상호작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아들러의 관점에서 총체적 유기체로서 강조되는 개인은 자신의 운명에 책임감을 느끼고 창조적이며 목표를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개인을 의미한다.
아들러는 저서에서 전체로서 개인과 공동체의 사회적 본질이 충돌하거나 보완하면서 개인이 완벽함 또는 우월감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을 자세히 조사하였다. 이렇게 개인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성격 이론에서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욕구를 강조한 것과 정면으로 대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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