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에너지의 변화
정신 에너지는 어떻게 단순한 본능의 한 표현인 강한 충동에 따른 방출(배가 고파서 먹거나 성적 자극을 받아 교접하는 것)에서 문화적 표현과 노력(즉 고급 요리나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변화되는가?
융은 이러한 에너지의 변형은 비유, 은유, 유추를 만들어내는 인간 마음의 타고난 능력 때문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은유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고, 표현할 필요가 있다.
사냥은 성적 대상을 찾는 것 같고 이런 비교는 사냥을 위한 열정과 흥분을 일으키는 데 적용되고 사용될 수 있다. 그러면 사냥 활동은 자체의 문화적 의미와 동기를 발전시키고 자체의 생명력을 갖는 것이다.
더는 성적 은유를 필요로 하지않고, 성은 사냥 은유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강한 비유, 은유, 유추의 잔상 일부는 항상 남아 있어서, 이러한 잔상들은 현대의 문화적 활동을 성적이라고 환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적 동기는 환자의 정신생활 퇴행기에 다시 생생히 등장하는데, 프로이트의 착상은 여기에 기반한 것이다.
융은 근친상간을 상징적으로 중요한 것이지, 생물학적으로 욕망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프로이트와 차이를 뒀다.
`어머니`를 향한 갈망은 유아기적 의존, 아동기, 그리고 무의식과 무책임성으로 퇴행하려는 욕망이란 것이다. 따라서 신경증을 치료하는 동안 근친상간의 환상들이 나타날 때, 융은 이들을 갈망에 대한 아동기 적 기억의 출현으로 보기보단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저항으로 해석했다.
게다가 이집트 파라오(왕)들의 예처럼 실제로 행해진 근친상간은 성적 원망의 충족이 아니라 생명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와의 결혼, 종교적인 상징이라고도 해석했다.
융은 리비도를 `의지`라고 봤다. 그리고 생명 의지와 죽음 의지로 나눴다. " 삶의 전반부의 [리비도의] 의지는 성장을 위한 것이고, 삶의 후반부 의지는 처음엔 나직이, 나중엔 제법 들릴 만큼 죽음을 향한 암시를 나타낸다."
융은 인간이 근친상간적 욕망과 행동에만 속박되어 있다면, 상징적으로 말해서 아동기를 벗어나는 정신의 운동이란 없으리라 생각했다. 낙원은 집이라는 공간으로 한정되고, 동시에 가혹하고 힘든 환경에 적응되지 않으므로 인간이란 종은 번성하는 데 실패한다 했다.
근친상간을 하지 않으려는 희생은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거지, 거세의 위협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본성의 일부로서 양심, 도덕성, 문화를 자연스레 발전시킨다. 따라서 문화는 인간이란 종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본능적 충족은 인간의 정신 체계에 타고난 것으로서, 우리가 알다시피 이 본능 없이는 문화나 인간 의식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능을 희생시키는 것은 표현과 활동의 한 형태에서 다른 표현과 활동으로 에너지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한 본능을 희생시키는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그 당시로선 분명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에게 어떤 직업을 선택하거나 어떤 시도를 하게 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여기서 떠오르는 핵심적 통찰은 `상징`이 리비도를 변화시키고 방향을 지시해주는 능력이 있으리란 것이다.
모델로서의 물리학
융에게 물리학은 정신 에너지를 이해할 수 있는 법칙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은유를 제공해줬다. 융은 에너지를 다룰 때 수량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신 에너지 또는 리비도 이론은 정신세계에 있는 대상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과론적-기계적 모델과 최종적인 모델은 에너지가 본래 갖는 상태와 관련해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과론적 -기계적 모델의 경우 정신계는 본래 정지 상태에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처음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후 정신계 외부에서 무엇인가가 개입해 그 상태에 에너지의 북돋움이 있을 때까지는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공을 치고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치면, 이렇게 사건의 연쇄가 일어난다.
최종적인 에너지 관점은 시초에 에너지가 이미 충만한 상태에 있다고 보며, 이 상태에서 운동의 다양한 형태들이 나타나는데, 이때 에너지는 더 개연적인 상태를 추구하고 마침내 균형과 정지 상태에 이른다.
융에 따르면, 콤플렉스가 특별한 양의 에너지를 가졌다고 볼 때 정신계가 비평형상태에 있게 되면 콤플렉스의 에너지는 운동을 일으킨다. 콤플렉스는 자극에 반응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창조적일 수도 있다.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콤플렉스는 환경의 자극을 그다지 받지 않아도 환상과 욕망 또는 사고를 갖고 자아의식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환경적 자극은 단순히 콤플렉스에 묶여 있는 에너지를 끌어들이거나 방출하는 정도이다.
최종적인 관점에서 콤플렉스는 그 에너지를 방출하고 낮은 에너지 단계로 되돌아가려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콤플렉스는 의식 주체에 사상과 감정이나 분위기 또는 환상을 도입함으로써 에너지를 끌어들이거나 방출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은 적절히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에너지 방출이 완료되면 콤플렉스는 무의식의 잠복 상태로 되돌아가 안착하고, 내부 정신계 안에 에너지를 더 쌓거나 외부 자극에 의한 포진을 기다린다.
에너지의 원천
융은 에너지의 관점에서 어떤 에너지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동해 분포하는 것을 추적하는 방법을 찾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콤플렉스는 새 정신 에너지를 두 가지 방법으로 끌어들인다.
하나는 콤플렉스와 연관되어 있고 콤플렉스를 풍부하게 하는 새로 생긴 정신적 외상에서 오고, 다른 하나는 콤플렉스의 원형적 핵심에 있는 자기력에서 오는 것이다.
콤플렉스의 원형적 핵심은 그 에너지를 두 원천에서 끌어들이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원형적 핵심은 연관되는 본능을 통해 에너지를 채우고, 본능과 원형은 정신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따라서 정신이 생물학적 토대에서 이 원형적 이미지를 이용할 수 있을 때, 원형적 이미지는 에너지의 유인자로 활동하는데, 다른 한편으로 원형들은 다른 원천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인다.
원형들은 타인들과의 교환, 심지어는 영 자체와의 교환을 통해 문화로 변환된다. 정신은 결코 닫힌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몸을 통해, 영을 통해 세상에 열려 있다.
자아는 홍수처럼 밀려오는 콤플렉스의 에너지를 어떻게 다룰까? 그 열쇠는 선택할 수 있는 자아에 놓여 있다. 자아가 충분히 강하고 흔들림이 없다면 이러한 에너지 흐름을 유도해 구조를 만들고 경계를 만들고, 구체적 활동을 기획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적 과잉이나 기능 장애를 겪게 되는 것이다.
융에게 정신은 폐쇄적 에너지 체계로 이해되지 않는다. 굳게 폐쇄된 정신계는 병리적이다.
정상적 정신계는 상대적으로만 열려있고 다소 폐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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