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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정신의 경계

by 심리를 도와주는 나그네 2022. 9. 6.
변화와 상징
 
 
융은 에너지가 따라 흐르는 길로서 기울기 정도를 보여주는 경사도를 제시한다. 자연 상태에서, 즉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이상적 상태에서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듯 어떠한 일을 하도록 요구받거나 요구할 필요가 없다.
 
 
편안한 집에 살면서 맘껏 잠자고, 발정기에 왕성한 성적 활동을 하는 애완견처럼 순전히 자연 상태에 사는 인간은 육체적 본능과 욕망만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문화를 창조했고 노동을 전문화했다. 이것은 에너지가 흐르는 자연적 경사도에서 벗어나 에너지를 이제 인위적 통로로 보내는 능력을 전제했다.
 
 
융은 자연과 문화를 완전히 상반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 모두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속한 것으로 본다. 인간이 문화를 만들고 노동을 전문화하는 것은 본능이 지향하는 목표와 활동에 상응하는 마음을 갖는 창조력 덕분이다. 이러한 상응적 유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상징의 기능이다.
 
정신적 내용인 관념과 이미지는 자연적 경사도와 대상에서 리비도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의 마음에 강렬한 젖가슴의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보자.
 
 
이러한 젖가슴의 이미지 관념이 실제로 작용하여 물리적인 젖가슴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 이것은 실제 유방이 어린아이에게 일으키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들인다. 이렇게 젖가슴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에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면, 이 아이는 젖을 먹으려는 욕구 충족을 미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젖을 떼는 단계를 벗어나 성인이 되면, 훌륭한 요리의 이미지가 젖가슴을 대체하는 유비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상징`은 스스로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끌어들이며, 정신에너지가 옮겨지고 보내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가 대표적인 예지 종교 상징의 힘은 막대하기에 그렇다. 상징의 힘이 제거되면 종교가 갖는 모든 구조가 붕괴하여 버릴 것이다.
 
 
상징은 왜 자연적 대상물보다 더 가파른 경사도를 갖고 있어 에너지 흐름을 가속할 수 있으며, 어떻게 머릿속에 일어나는 하나의 관념이 유방이나 남근처럼 본능적으로 끌리는 대상물보다 더 흥미를 유발하고 압도적으로 되는 것일까?
 
 
융은 이런 일이 자아가 결정을 내려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상징들은 성격의 원형적 토대, 즉 집단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상징이란 자아가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절실히 필요할 때 무의식에서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상징은 리비도를 조직하는 위대한 조직자다. 상징이란 단순한 신호가 아니다. 정지 신호는 정지하라는 의미이다. 신호는 문자적 의미를 잃지 않고도 읽히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융이 이해하는 상징이란 현재의 의식 상태를 고려해볼 때 본질적으로 알 수 없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상징은 상징이 소통하고자 하는 의미를 현재로선 최상으로 표현하는 정도로만 머무른다. [그래서 어떤 신호인지 문자적 의미는 미궁이지. (내 생각)]그래서 상징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에 열려 있다.
 
 
 
상징은 또한 영과 본능, 즉 이미지와 충동의 요소들을 결합한다.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처럼 상징적 경험을 통해 몸과 영혼은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전일성의 감정으로 결합한다.
 
상징은 자연적 에너지를 문화적, 영적 형태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으므로 융에게 매우 중요하다.
 
 
변화와 승화는 융과 프로이트 이론의 기본적 차이를 보여준다. 프로이트에게 문명인은 리비도적 욕망을 승화시킬 수 있지만 승화는 그러한 욕망이 지향하는 대상의 대체물만 생산한다고 했다.
 
 
리비도는 유아기로, 부모 역할이 고착된 시기로, 오이디푸스적 환상이 성취되는 시기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분석은 항상 환원론적이다.
 
융은 리비도가 원래 어머니의 몸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동의한다. 왜냐하면 양육은 아기가 생존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리비도는 성적 통로로 이끌리고, 이러한 성적 경사도를 따라 흐르는 것이다. 종이 생존하는 데 출산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러나 영적으로 유비되는 관념이나 이미지를 찾게 된 리비도는 관념이나 이미지로 나아간다. 이 관념이나 이미지는 리비도가 지향하는 목표이지, 성적 충족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문화는 욕망의 장애물이 아니라 성취고, 융은 인간 본성이 문화를 형성하고, 상징을 창조하고, 에너지를 포착하여 머물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4장 정신의 경계(본능, 원형, 집단 무의식)
 
 
 
융에게 원형은 정신 에너지와 이러한 에너지가 보여주는 형태의 근본적 원천이다. 원형은 정신 상징의 궁극적 원천을 이루고 있다. 이 정신 상징이 에너지를 끌어들이고, 구성하고, 마침내 문명과 문화 창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융의 관점에서 원형과 본능은 서로 깊이 관련된다. 융은 마음과 몸이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서 거의 분리되지 않는다고 봤다. 이 점이 간과되면 원형 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과도하게 영적이고 근거가 희박한 심리학으로 전락하기 쉽다.
 
 
집단적 무의식 영역 때문에 융은 보통의 심리학에서 멀어져간 신비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 이론적 도구가 생물학적 연구 기법, 특히 뇌와 사람의 기분 및 사고에 대한 뇌의 화학적 작용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쉬워짐으로써, 융이 몇십 년 전에 수행했던 광범위한 가설들과 씨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학습한 것은 정신적 행동의 형태와 양육의 결과이지 자연이 아니라고 여겼었는데, 인간 행동의 생물학적 토대에 대한 최근의 많은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 유전적으로 이어받는 것이라는 융의 시각을 확증해주고 있는 것 같다.
 
 
융에게 원형은 유전적 기질로 부여받는다는 것, 즉 타고난다는 점에서 본능과 같다.
 
융은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층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무의식의 내용은 `원형`과 `본능`이라고 하는 보편적 형태와 힘이 결합한 것이라고 봤다. 본능과 원형은 우리 모두 각자가 부여받은 자연의 선물이다.
 
 
새들이 철 따라 이동하고 집을 짓는 본능은 개별적으로 학습되거나 획득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개성화는 상당 기간에 걸쳐 정신이 갖는 역설에 개인이 의식적으로 관여하면서 피어나는 꽃이다.
 
 
 
원형(정신의 보편자)
 
 
융은 리비도, 즉 성 그 자체는 이중적 본성을 지녔다고 과감히 주장했다. 리비도는 한편으로는 성적 관여와 즐거움에서 만족을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관여를 금지하고 심지어 그 반대편, 즉 죽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삶을 향한 원망과 같게 죽음을 향한 원망이 있다고 제안하면서, 삶을 향한 원망은 죽음을 준비하는 삶 후반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봤다.
 
성적 만족이나 다른 만족을 희생시키고, 대신에 어떠한 성적 활동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성적이지 않은 성향과 욕망을 추구하는 경향은 인간에게 고유하게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 진화의 과정에서 성적 리비도는 처음엔 은유와 유사성을 통한 문화의 길로, 다음에는 더 심화한 변화로 발전해왔다는 이론을 융은 제시했다.
 
 
융은 영웅 진화에 포진된 콤플렉스의 윤곽을 그려냈고, 의식을 창조하는 영웅들의 역할에 주목했다. 영웅이란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형태이다. 이러한 영웅이 보여주는 역할은, 성인의 방식으로 삶에 책임을 지며 현실에 직면하는 것이다.
 
영웅의 원형은 어린애 같은 환상적 사고에서 벗어나 적극적 방식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지 못했다면 영겁 이전에 이미 파멸됐을 것이다.
 
 
정신의 보편자를 같게 추구한 것은 프로이트의 흥미를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관심은 융과 매우 달랐다. 프로이트는 하나로 된 무의식의 원망, 즉 모든 정신 갈등을 설명할 수 있는 중심 콤플렉스를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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