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그리고 아니마와 아니무스
융은 모든 인간이 같은 원형을 공유한다고 했지만, 남성이 한쪽을 여성이 다른 쪽을 별개로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구별을 원하지 않았다면, 융은 양성을 나타내는 데 특별한 구분을 두지 않고 같은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아니면 `아니미(animi)` 같은 중성적 용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융에 따르면 남성은 외부에 남성성을 드러내고 내부에 여성성을 드러내며 여성은 이와 반대다.
아니마의 보완적 특성은 의심할 나위 없이 자신 스스로 증명한 대로 성적 특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매우 여성적인 여성은 남성적 영혼을 갖고, 매우 남성적인 여성은 여성적 영혼을 갖는다. "보통 의식적 태도에는 빠져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 특질이 아니마에는 존재한다." 위 구절을 얘기할 때는 융이 아직 그림자 개념에 대해 확실히 정리 못 한 상태이다. 그림자와 아니마/무스의 이러한 구분은 나중에 정리한다.
"아니마가 타락한 인간이 갖는 특질을 모두 갖고 있다. 페르소나가 지성적이라면, 아니마는 지나치게 감성적일 것이다". 이렇게 융이 말한 건 나중에 그림자의 요소로 설명되지만 젠더 문제로 귀결되는 건 왜 그럴까?
젠더 간 차이로 나타나는 특성들이 아니마/무스가 갖는 구조의 이미지에 포함되는 것은 이러한 아니마/무스의 구조가 페르소나에 보완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만일 한 남성의 페르소나가 특정 문화에서 남성성으로 통용되는 특질과 특성을 갖는다면, 그 이미지와 맞지 않는 성격 특성들은 억압되어 결국 보완적인 무의식 구조인 아니마에 모두 집결될 것이다. 이때 아니마는 이 문화에서 전형적 여성성으로 통용되는 특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매우 여성적인 남성도 있고 매우 남성적인 여성도 있다. 그러면 그들의 아니마/무스는 어떨까? 개별적 인간이 지배적 문화에 의식적으로 적응하면서 배제되어 남은 것은 모두 융이 아니마/무스라고 일컬은 구조 주변으로 모이게 된다.
극도로 여성적인 남성의 내면 태도(아니마)는 페르소나가 적응하면서 남은 것이므로 특징상 남성적으로 된다.
그리고 아니마/무스와 같은 내면 태도는 무의식 안에 있으므로 자아의 통제를 덜 받으며 페르소나가 갖는 정교함보다 떨어지고 미분화된 상태로 남는다. 열등 형태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매우 여성적인 여성은 남성적 영혼을 갖지만 매우 정교한 남성적 영혼을 갖는 건 아니다.
6장 심층의 내부에 이르는 길(아니마와 아니무스) - 2
아니마/무스 발달
페르소나는 집단적 가치와 특성에 기초하므로 개인적 고유성을 갖게 하는 잠재력은 페르소나가 아니라 정신의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한 사람의 자아의식이 페르소나와 동일시되어 하나가 된다고 느끼는 경우, 집단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서 그 사람만이 갖는 고유한 성격의 특질을 형성하고 개성화를 제대로 드러낼 여지는 배제되고 만다.
한 남성이 페르소나와 동일시될 때, 그의 개인적 특질은 아니마와 연관되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이 매일 차를 타고 직장에 간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집단에서 하는 역할과 동일시되어 그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자기 성격을 갖고 있지 않는다.
만약 이 사람이 인습에 거의 얽매이지 않는 여성들에게(아마 은밀히) 매력을 느낄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그의 아니마 투사를 가졌고, 그의 영혼의 초상을 그려주고, 그의 모험과 대담한 정신을 포착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인 남성과 이 남성의 비전통적인 아니마를 갖는 여성이 정사를 나누게 하는 정신의 진짜 목적은(빈번히 정신을 잉태하는 상징에 대한 꿈을 꾸게 한다 함) 상징적 아이를 출산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아이의 출산은 그의 성격 안에서 두 대극이 연합한다는 거고, 이건 자기 self의 상징을 의미한다.
아니마/무스와의 만남은 자아가 달성할 수 있는 가장 깊고 높은 범위에 이르게 하는 잠재력을 가진 정신 수준들과의 만남이다. 아니마/무스의 구조는 광범위하게 다리를 놓아 자기 self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아니마/무스는 집단 무의식 가운데, 그리고 원형과 원형 이미지의 구조 가운데 깊이 닻을 내리고 있다. 아니마는 무의식과 `그 자체의` 특질에 의해 형성된다. 아니마/무스는 특정 시대의 집단적 합의가 아니라 원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아니마/무스의 태도가 원초적 기원을 갖는 유전적 요인이라고 융은 주장했다. 본질적인 여성적 이미지가 아니라 `남성에게 드러나는 모습으로서의` 여성적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아니무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내면적 구조가 생성한 이미지, 사고, 추정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모든 혼란과 당혹을 일으키는 배후가 된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보다 상대편 성이 갖는 `이미지`와 관련되는 수가 많으므로 서로가 오해하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 각자의 무의식에 내장된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들은 원초적이며, 역사적, 문화적 환경의 영향은 별로 받지 않는다. 큰 변화 없이 영속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대대로 인간들 각자의 정신에서 그 모습을 반복한다.
아니마/무스와 함께 의식 고양
그림자 이미지가 두려움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면, 아니마/무스 이미지는 보통 흥분을 일으키고 연합하려는 욕망을 갖게 한다.
융의 시각에서 아니마/무스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의 의식적 의지나 지식을 훨씬 넘어 존재하는 원형적 힘의 이미지에 안내받아 운명에 이르게 된다.
그림자는 개인적으로 무의식의 관계적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투사할 때 경험된다. 마찬가지로 아니마/무스는 그러한 특색과 특징을 가진 사람, 즉 아니마/무스에서 무의식의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한 투사에 포착된다.
이런 투사가 일어날 때 무의식의 정신이 의식에 포진해 나타나는 것은 다음 세 인물이 서로 밀접히 연관되는 상태라고 융은 주장한다.
"남성에게 아니마 인식은 3인조, 즉 남성적 주체, 대극에 있는 여성적 주체, 그리고 초월적 아니마를 생성하는데, 이 가운데 3분의 1이 초월적 특성을 갖는다. 여성에겐 이 같은 3인조가 역전되어 여성적 주체, 대극에 있는 남성적 주체, 그리고 초월적 아니무스를 생성한다."
일반적으로 투사 대상으로서의 투사 운반자와 투사가 융합되면 아니마/무스, 그리고 주체와 대극적 위치의 주체가 하나가 되는데, 이렇게 되려면 상당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각각은 세 가지 형태의 독립적 지위를 갖는데 (1) 개인적 주체성과 함께하는 의식적 자아, (2) 그/그녀의 의식적 자아 및 개인적 주체성과 함께하는 또 다른 인물인 상대 짝, (3) 아니마/무스의 원형적 이미지
융은 이 3인조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네 번째 인물을 통해 완성된다고 봤다. 네 번째 인물은 남성의 경우는 `노 현자 wise old man`이고 여성의 경우엔 `지모(지혜로운 여성)`가 된다. 이걸 전부 다 아울러서 사위체라고 부른다.
아니마/무스와 이러한 지혜의 인물들은 본질적으로 무의식에 속하고 영의 영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다. 반면에 자아와 상대 짝은 이러한 아니마/무스가 의식에 포진하도록 자극하는 감정적 관계에 관여하는 의식적 인물들이다.
만일 의식이 이런 사랑과 매혹 상황에서 인간적 특성과 원형적 특성의 차이를 충분히 인식한다면, 자기 self가 완전한 경험에 이르는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다.
투사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니마/무스에 대한 이런 경험은 심리적 성숙의 여러 단계에서 나타나며 단순하지 않다.
청소년기에도 일어나고 성년기에도 일어나며 심지어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아니마/무스는 심리적 삶에서 영원히 활동하며 이런 활동이 없으면 우울증에 빠진 상태라는 걸 단적으로 알려준다. 이것은 육체적 성을 초월해 존재하는 정신의 성이다.
정신의 성은 육체적 성을 초월해 존재한다. 아니마/무스 경험을 할 수 있는 심리적 능력이 제대로 활동하려면 꽤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투사된 것과 투사 운반자, 즉 환상과 현실 사이를 구분하는 능력은 실로 흔하지 않다.
그래서 융이 말하는 실현(무의식이 의식에 포진하는 데 관여하는 사위체, 그리고 초월적 특성들에 대한 경험적 실현)은 소수의 개인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수자들은 심리적 분별 능력이 있는 쿤달리니 각성 숙련자들과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아니마/무스는 마야, 허상의 창조자, 혼미자, 사기꾼, 신기루 같은 잡히지 않는 영원한 애인이다.
활동 중인 이런 초월적 인물들을 분간하지 못하고 아니마/무스라는 허상의 게임을 통해 보게 되면, 아니마는 진정으로 파악하기 힘든 `무자비한 미모의 여인이며`, 그래서 우리는 냉소와 절망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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