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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심층의 내부에 이르는 길

by 심리를 도와주는 나그네 2022. 9. 11.

6장 심층의 내부에 이르는 길(아니마와 아니무스)

 
 
 
통상적으로 남성에게 아니마는 여성적 인물이고 여성에게 아니무스라는 내적 인물은 남성적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그림자보다 더 깊은 무의식을 표상하는 주관적 인격들이다. 좋든 나쁘든 그들은 영혼의 특성들을 드러내고 집단 무의식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아니마/무스는 페르소나가 반영하는 자기 표상과 자기 정체성을 일치시키지 않는 정신 내부의 한 성격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하는 방식으로 자아에 속하진 않는다.
 
 
만일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구분하는 게 `악에 대한 `선의 측면이라면 자아와 아니마/무스의 구분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극으로 표시되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정의

 
융은 후기 저작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정신의 원형적 인물들로 언급한다. 그래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가족, 사회, 문화, 전통 같은 개인의 의식을 형성하고 구체화하려는 영향력을 넘어서서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원형은 문화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융 이론에서는) 문화적 형태가 원형에서 나온다.
 
따라서 아니마/무스를 이렇게 원형으로 정의하면, 아니마/무스의 가장 깊은 본질은 완전히 정신 밖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이 본질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하는 비개인적 영의 형태와 힘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말해 아니마/무스는 정신의 한 구조를 형성한다.
 
아니마/무스는 페르소나와 서로 보완적이며, 자아가 최심층에 위치한 자기 self의 이미지와 경험에 연결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페르소나는 자아가 세계를 만나기 위해 채택하는 습관적 태도고 기능 콤플렉스이다. 아니마/무스도 기능 콤플렉스긴 하지만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 사이에 존재한다.
 
페르소나는 자아의식과 외부 세계의 대상들 사이에서 일종의 층위를 형성한다. 아니마/무스는 다리, 문 같은 기능을 해서 집단 무의식의 이미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오로지 대상과의 관계에 관여하는 반면에 아니마/무스는 주체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여기서 주체란 무엇보다 그러한 모호하고 희미한 일깨움, 감정, 사상, 감각을 의미한다.
 
 
이들은 우리가 대상을 의식적으로 경험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흘러들어오는 게 아닌 어두운 내면의 심층에서 오는 불안하고 억누르는 형태로, 때론 친화적 형태로 분출된다. `주체`란 자아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무의식의 세계이다.
 
 
주체는 정신의 주관적인 면, 기반, 내면의 공간이다. 주체는 `내적 대상`, 말하자면 이따금 융이 `이마고` 또는 단순히 `이미지`나 `내용`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적어도 이런 특수한 경우에 `주체`란 말은 무의식을 지시하므로 "외부 대상, 다시 말해 외부를 향한 태도(즉 페르소나)와의 관계가 존재하듯 내면 대상, 즉 내면을 향한 태도와의 관계도 존재한다"라고 귀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나 감지하는 외부를 향한 태도에 비해 내면을 향한 태도는 너무 사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워서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들이 심층적 내면의 자기에 대해 느끼는 방식은 그들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적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페르소나가 외부 세계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듯, 아니마/무스는 정신의 내면세계로 나아가 직면하는 직관적 사고와 감정 및 이미지의 요구와 요건에 적응하게끔 한다.
 
 
만약 아니마 문제를 갖고 있다고 할 때 그의 아니마는 감정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 자아의식으로 가스처럼 스며드는 기분을 일으켜 자아의식과 더불어 미숙하고 분화되지 않은 정서를 수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 기능과 상충한다.
 
이 남성의 자아는 아니마의 성격과 동일시되는데 이런 성격은 대체로 지나치게 민감하고 무기력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는 감정적 반응에 대처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가 맺는 관계는 주로 갈등으로 끝난다. 아니마는 그에게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아니무스 문제를 가진 여성도 아니마 문제를 가진 남성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차이점이라면, 남성이 여성보다 더 지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니무스에 의해 속박되지 않은 자율적 관념과 의견은 장애를 일으키는 감정적 에너지를 수반하므로 그녀가 세상에 적응하는 데 오히려 방해된다.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것이다. 아니무스는 자아나 바람직하다고 간주하는 페르소나와 일치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성격이다.
 
 
아니마에 사로잡힌 남성은 상처받는 감정 때문에 위축되는 경향이 있고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여성은 공격적인 경향이 있다.
 
어쨌든 양자의 경우 `사로잡힘`의 내용이 무엇이든 무의식의 내면세계는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 있으며,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욕구는 그 사람의 삶 전반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이것 역시 물론 자아의 문제로서 미발달된 자아의 징후를 보여준다. 아니마/무스의 구조가 거의 발달하지 않는 문제도 있다.
 
 
이러한 발달 결핍은 필요할 때 그 일을 수행하기엔 지나치게 연약하거나 무력하다. 따라서 남성은 전형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줄 여성을 찾고, 여성은 전형적으로 자신의 영감 어린 생각을 수용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남성을 찾는다.
 
 
이상적 심리발달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때 의식과 무의식은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한다. 이건 아니마/무스와 페르소나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삶의 에너지인 리비도는 퇴행하기보다 진전하는 형태로 들어와 삶의 과제와 요구에 적응하게 한다.
 
페르소나는 삶의 요구에 적응하고 외부환경과 안정된 관계를 유지한다. 내적으로는 에너지와 창조적 영감의 원천에 대해 안정되고 꾸준한 접근이 이뤄진다.
 
 
하지만 현대 문화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참된 내면의 성장, (페르소나에 기초한) 집단 문화와 반대되는 `개인 문화`라고 일컬은 내면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이 좀 막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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