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타자와 드러내고 감추는 관계(페르소나와 그림자)
페르소나 발달
초기 성인기에 접어들면 자아와 페르소나 양쪽 모두 골고루 발달하여, 자아가 이중적으로 필요한 독립 지향과 관계 지향이 충족되고, 동시에 페르소나는 자아가 현실 세계에 살기 적합한 적응을 한다.
페르소나 발달엔 두 가지 난제가 잠재되어 있다. 하나는 페르소나와의 지나친 동일시로, 세상살이에 만족하고 적응하는 것이 지나쳐 이렇게 구성된 이미지가 성격 전부인 양 믿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외부 대상 세계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내면세계(융이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의 지배라고 일컬은 조건)에만 지나치게 관여한다. 이런 사람은 소위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운명의 강한 타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을 때 이런 특성들을 포기한다.
페르소나 발달은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다. 이 기간에 내면세계의 활동이 무척 활발해진다. 즉 한편에서는 수많은 충동, 환상, 꿈, 욕망, 이념, 이상주의가 일어나고, 다른 한편에선 순응을 요구하는 동류 집단의 압력이 매우 높아진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모두 페르소나를 발달시킨다. 외향적인 사람의 경우는 비교적 단순히 진행된다. 외향적인 리비도는 대상에게 나아가 머물고, 딱히 소동이나 혼란을 겪지 않고 받아들여 결부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정신 에너지는 대상에게 나아가지만, 다시 주체에게 되돌아온다. 이로써 대상들과 더 복잡한 관계가 초래되는데, 대상은 정신 밖에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 내부에 깊이 파고든 상태에 있다.
대상 세계가 매우 밀접한 상태에서 위협하는 것이 아니기에 외향적인 사람들은 그다지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내향적인 사람의 페르소나는 모호하거나 다르고 불분명해서 상황마다 다르게 반응한다.
모든 사람에게서 페르소나는 대상들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주체를 보호해야 한다. 이게 페르소나의 이중 기능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말해 자아와 세계 사이에 있는 정신의 외피라고 할 수 있는 페르소나는 대상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산물인 동시에 이러한 대상들에 개인이 투사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들에 대해 우리가 감지한 것과 그들이 원하는 것에 맞춰 적응한다.
이러한 인식은 타인들이 우리를 보고, 타인들이 그들 자신을 보는 방식과 매우 다를 수도 있다. 콤플렉스에서, 특히 부모 콤플렉스에서 발원한 투사는 페르소나 구조에 둘러싸이게 되며, 이것을 동화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로 되돌아와 페르소나로 들어간다.
이것은 초기 아동기가 나중에 성인 페르소나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성장해 부모를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부모의 존재는 이 사람의 페르소나에 지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왜냐면 부모라는 존재는 부모 콤플렉스로 세상에 투사되고, 개인의 페르소나를 통해 세상에 계속 적응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우린 소년기에나 요구되는 착한 어린이로 남는다. 적응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인해 본래 상황에서 새롭고 꽤 다른 상황으로 페르소나가 투사되기 때문에, 이 페르소나를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넘기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관찰한 `전이`라는 개념이다. 아동기의 옛 상황은 의사 - 환자 관계라는 새 상황으로 전이된다.
이러한 두 사회적 환경이 어떻게 다른지 깨닫지 못하면, 사람은 이전의 습관적 행동에 갇힌 나머지 새로운 환경이 마치 익숙한 환경인 양 착각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페르소나 변화
변화된 환경에 대한 자아의 지각이나 그 환경과 작용하는 능력에 따라 페르소나는 생애 과정에서 여러 번 변경될 수 있다. 자아는 적응해야 하는 난관에 대해 자아 관념과 페르소나의 자기 표상을 적절히 변경함으로 대처한다.
생애 과정에서 사람이 취하는 다양한 역할은 집단적이며, 어느 정도는 원형적 기초를 가진다. 모든 기능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페르소나는 원형적 핵심을 가진다.
모든 인간 집단에는 각기 맞게 채워져야 할, 예측할 수 있으며 전형적인 역할이 있다. 가정에는 자녀와 부모가 담당해야 할 전형적 역할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족, 집단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역할을 할당받으며, 어린 시절에 그 역할들을 받아들이면 생애에 걸쳐 이와 비슷한 역할을 지속하곤 한다.
사람들에게 페르소나가 끈질기게 붙어 있게 하는 원인은 부분적으론 동일시와 높은 친숙성 때문이다. 페르소나는 성격과 동일시되며 종종 정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제공한다.
이와 반대로 수치심이 근본적인 동기 유발자이기도 하다.
페르소나는 사람을 수치심에서 보호해준다. 특히 동양 문화에선 수치심 문화가 강조된다. `체면`을 잃으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보니까 말이다.
우리는 페르소나와 다르게 행동할 때 죄의식을 갖거나 깊이 수치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격에서 그림자가 실현된 것이다.
그림자는 수치심, 무가치하다는 의식, 더럽고 달갑지 않다는 불결의 감정을 일으킨다. 그림자의 또 다른 특성은 공격성이다. 공격적이고 증오를 일으키거나 시기하는 감정은 수치의 감정이다.
이렇나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은 감추려 드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일으키는 반응 때문에 당황한다. 하지만 이건 자신에게 비치는 우리 육체적 또는 성격상 결점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다.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통합
통합은 자기 수용에 달려 있다. 자기 수용이란 페르소나에 속하지 않은 이상적 이미지 또는 문화적 규범 같은 이미지를 자신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림자의 자료는 늘 악한 게 아니다. 페르소나에 순응하지 않아서 그림자에 붙어 있는 수치심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페르소나와 그림자라는 두 대극의 갈등은 개성화의 국면, 즉 통합을 통해 성장할 기회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림자 내용은 페르소나에 수용될 수 없으므로 격렬한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융은 페르소나와 그림자라는 두 극이 긴장 관계에 있을 때, 자아가 페르소나와 그림자 모두를 허용하고 무의식은 새로운 상징 형태로 창조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내면의 빈 곳을 창조한다면 갈등이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징의 역할을 통해서 페르소나와 그림자 대극들의 관계가 진척되는데, 이러한 진척은 양자의 절충으로 그치는 게 아닌, 자아가 새로운 태도를 보이고 세상과 새롭게 관계를 갖도록 두 대극이 연합하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어두운 면이 너무 심하고 지나치게 에너지로 채워져, 사회적으로 수용할 만한 페르소나와의 통합할 수 없어지면 오늘날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향정신성 의약품뿐이다.
이 의약품은 완충제 역할로 그림자의 힘이 나오는 원천을 차단할 수 있다. 이와 다른 경우, 자아는 추동을 조절하기에 너무 불안정하고 약해서 초월 기능이 포진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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