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시리즈 2편이다.
자아는 근본적으로 무엇일까? `나`가 생애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다. 두 살 때 엄마를 찾으며 우는 `나`는 마흔다섯 살에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우는 `나`가 아니던가.
자아의 많은 특성은 발달하고 변모하지만, 자아의 밑바닥에는 중요한 연속성이 있다고 우리는 의식한다.
우리가 동물의 의식과 차이 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인간의 언어 능력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나`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고, 그래서 더 복잡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둘째, 인간은 의식에 존재하는 순전한 자기 반추적 기능도 갖추고 있다. 이 기능은 사람이 지금 존재한다(나중엔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의식 안에 새겨진 거울인 이러한 자아 기능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동물에겐 의식에 자기 반추적 기능이 아예 없거나 현저히 부족하다.
동물은 자아가 부족한 것. 동물은 자아 의식적이지 않고, 언어를 갖지 않아서. 자신들의 어떤 의식도 섬세하게 제대로 표현 못하고 인간이 구사하는 언어의 능력으로 자신과 타자를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한다.
어느 발달 시점이 지나면, 인간의 자아와 의식은 주로 그가 자라고 교육받는 문화적 세계에 의해 한정되고 형성되는데, 중심적 자아를 에워싼 자아 구조의 층 또는 표층이다.
융은 이런 자아의 두 가지 특성을 `성격 1호`와 `성격 2호`라고 불렀다. 성격 2호는 선천적 핵심 자아, 성격 1호는 장기간에 걸쳐 성장해 문화적으로 습득한 자아 층을 의미한다.
자아가 몸에 더 깊이 자리 잡은 건 맞지만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융은 [아이온]에서 자아는 다른 두 토대, 즉 신체 토대와 정신 토대를 바탕으로 한다고 진술했기에 그렇다.
융이 생각하기에 정신이란 몸의 단순한 표현, 뇌 화학작용의 결과나 어떤 신체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다. 정신은 마음이나 영의 성질을 가지므로 그 신체적 자리를 때론 초월할 수 있고, 또 초월하기도 한다.
일단은 정신과 몸이 인접해 경계를 이루는 것도 아니고 서로에게서 각자가 나온 것도 아니라는 언급으로 충분하다.
자아는 몸과의 일치를 체험한다는 의미에서만 몸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자아가 경험하는 몸은 정신적이다. 자아는 몸의 이미지이지, 몸 자체가 아니란 것이다.
융이 정신의 경계에 선을 그어 자아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했지만 신체적 토대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생리학적 과정은 정신으로, 심지어 `무의식`의 정신으로 결코 넘어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과정은 원칙적으로 의식화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교감신경계는 대부분 의식에 분명히 접근되지 않는다.
신체적 토대로 관통해 들어갈 수 있는 자아의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발달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요기(요가 수행자)들은 신체 수련을 통해 조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영역은 아직 탐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경계치(방 안과 밖의 경계를 이루는 문지방처럼)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하나는 의식과 무의식을 구별하는 경계치, 다른 하나는 정신(의식과 무의식 둘 다 포괄)과 신체적 토대를 구별하는 경계치다.
이 경계치들은 너무 광범위하다. 유동적 경계들로 간주하여야지 고정되거나 굳게 가로막힌 장벽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자아는 정신의 신체, 즉 몸의 이미지에 근거를 둔 거지 몸 자체에 근거를 둔 게 아니다. 그래서 자아란 본질적으로 정신적 요소이다.
표층(자아의 식적) - 2
자아의 위치
정신의 모든 영토는 자아의 잠재적 관할 범위와 매우 가까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융이 앞 구절에서 정의 내린 대로, 정신은 자아가 원칙적으로 이를 수 있는 범위에 묶이고 제한된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정신과 자아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신은 무의식을 포함하고 자아는 대체로 의식에 제한돼서 그렇다. 물론 자아도 적어도 잠재적으론 무의식을 이용할 수 있다.
여기서 요점은 정신 자체에 한계점이 있단 것이다. 그 한계점은 정신이 자극이나 정신 밖의 내용을 원칙상 의식적으로 더는 경험할 수 없는 지점이다. 칸트의 철학적 견지에서 볼때, 이러한 경험될 수 없는 실체를 `물 자체`라고 불렀다.
융이 의도적으로 남겨둔 틈과 여지를 억지로 끼워서 맞추려면 안된다.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이 결합한 영토를 `엄밀히` 함께 포괄하는 것도 아니고, 자아의 범위에 꼭 맞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함께 모이고 영혼과 세계가 만나는 바로 그 가장자리에, `내부/외부`의 경계선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이 회색 지대를 융은 유사 정신이라 부른다. 이 영역은 정신처럼 행동하지만, 오로지 정신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 회색 지대에 심신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는 것이다. 어떻게 마음과 몸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 어디에서 둘 중 하나가 멈추고 나머지 하나는 시작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여전히 대답 되지 않은 상태이다.
융은 무의식적 내용의 총합 안에서 전혀 의식적으로 될 수 없는 내용이 있다고 얘기했는데 이건 초기 정의에서 정신 밖에 남겨져 있었다. (전혀 의식적으로 될 수 없는 내용이 세번째 부류고 두 번째 부류는 자발적으로 재생산될 수 없는 무의식의 내용, 첫 번째는 자발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일시적 잠재의식의 내용(기억))
여기서 융은 이것을 무의식 안에 둔 것이다. 그는 무의식이 더는 정신이 아닌 곳에 도달하며 비정신적 영역, 즉 정신을 넘어 존재하는 `세계`로 확산한다고 봤다.
여기서 우리는 미스터리의 경계선들인 정신 밖의 지각, 동시성, 몸의 기적적 치유 등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융은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이라는 두 양태가 존재한다는 논거로 그는 "두 번째 부류는 잠재의식 내용이 의식에 자발적으로 돌입한다는 사실에서 추론된다"라고 했다.
이 말은 콤플렉스가 어떻게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한다. "세 번째 부류는 가설에 근거한다. 즉 두 번째 부류의 기초가 되는 사실에서 논리적으로 추론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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